영국 윌리엄 왕세자의 축구 사랑은 꽤나 유별나다. 최근 소셜 미디어에서 화제를 모은 로열 애스컷(Royal Ascot) 행사 영상만 봐도 그렇다. 화려한 마차에 올라탄 왕세자 부부를 향해 군중 속 누군가가 대뜸 “빌라 파이팅(Up the Villa)!”을 외치자, 윌리엄은 빙긋 웃으며 “요즘 다들 그렇게 말하더군요. 당신도 그런가요?”라며 자연스럽게 클럽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학창 시절부터 남들이 다 응원하는 뻔한 인기 구단 대신 애스턴 빌라를 택해 오랫동안 지지를 보내왔다는 그는, 빌라의 성공적인 유럽 대항전 행보 등을 언급하며 “정말 좋은 시즌”이라고 화답했다.
팬들은 이 짧은 영상 속에서 왕위 계승 서열 1위의 소탈하고 친근한 면모에 열광했다. 확실히, 이번 시즌 애스턴 빌라는 영국 왕실의 열성 팬이 자랑스러워할 만큼 프리미어리그에서 매서운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 ‘훌륭한 시즌’의 한복판에서 빌라 팬들에게, 어쩌면 윌리엄 왕세자에게도 상당히 뼈아픈 일격을 가한 선수가 있다. 바로 토트넘 홋스퍼의 캡틴 손흥민이다.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의 마지노선인 4위 자리를 두고 피 말리는 경쟁을 벌이던 두 팀은 빌라 파크에서 외나무다리 승부를 펼쳤다. 결과는 토트넘의 4-0 완승. 그 중심에는 1골 2도움을 몰아치며 빌라의 수비 라인을 말 그대로 붕괴시킨 손흥민이 있었다.
사실 경기 양상이 처음부터 토트넘 쪽으로 기울었던 건 아니다. 손흥민을 최전방에 세우고 브레넌 존슨, 제임스 매디슨, 데얀 쿨루세브스키가 뒤를 받친 토트넘은 70%가 넘는 점유율을 쥐고도 전반 내내 겉돌았다. 유효 슈팅은커녕 단 한 번의 슈팅만을 기록했을 뿐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후반 시작 3분 만에 핵심 수비수 미키 판더펜이 부상으로 쓰러지며 라두 드러구신이 급히 투입되는 악재까지 겹쳤다. 자칫 홈팀 빌라의 페이스로 완전히 넘어갈 수도 있는 아찔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후반 5분, 매디슨이 왼발로 밀어 넣은 선제골이 막혔던 혈을 뚫었다. 분위기가 반전되자마자 손흥민의 이타적인 플레이가 빛을 발했다. 쿨루세브스키가 상대의 패스를 끊어내며 시작된 역습 찬스. 중앙에서 공을 달고 내달리던 손흥민은 직접 슛을 때리려는 욕심을 버리고 왼쪽으로 쇄도하던 존슨에게 완벽한 타이밍에 공을 건넸고, 존슨은 이를 오른발로 가볍게 밀어 넣었다. 다급해진 빌라는 존 맥긴이 데스티니 우도기에게 거친 태클을 범하다 다이렉트 퇴장을 당하며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
수적 열세 속에서도 빌라가 막판 파상공세를 펼쳐봤지만, 승부에 완전히 쐐기를 박은 건 결국 손흥민의 발끝이었다. 후반 추가시간에 접어들자마자 오른쪽 측면에서 쿨루세브스키가 찔러준 낮은 크로스를 손흥민이 날카로운 오른발 슈팅으로 연결해 골망을 갈랐다. 빌라의 추격 의지를 꺾어버린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곧이어 10분의 추가시간 중 4분가량이 흘렀을 무렵, 페널티 박스 왼쪽에서 내준 침착한 컷백으로 티모 베르너의 네 번째 골까지 어시스트하며 손흥민은 이날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벽하게 초과 달성했다.
이 경기에서만 3개의 공격포인트를 쓸어 담은 손흥민은 리그 14골 8도움을 기록, 단숨에 시즌 공격포인트 22개 고지에 올랐다. 프리미어리그 득점 부문에선 선두 엘링 홀란(맨체스터 시티·18골)을 4골 차로 추격하며 공동 4위에 안착했고, 도움 순위 역시 1위와 불과 2개 차이인 공동 6위다.
무엇보다 눈여겨볼 점은 2016-2017 시즌부터 무려 8시즌 연속으로 공식전 공격포인트 20개 돌파라는 대기록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프리미어리그로만 한정해도 2021-2022 시즌(23골 9도움) 이후 2년 만에 다시 20개 이상의 공격포인트를 만들어내며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했다.
토트넘은 이날 귀중한 승리로 4위 애스턴 빌라(승점 55)와의 격차를 승점 2점 차(승점 53)로 바짝 좁혔다. 심지어 빌라보다 한 경기를 덜 치른 상태라 4위 탈환의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게 됐다. 윌리엄 왕세자의 말마따나 애스턴 빌라가 이번 시즌 인상적인 성과를 내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적어도 빌라 파크에서 벌어졌던 그날의 90분 만큼은, 왕실의 열렬한 지지조차 런던에서 온 7번 공격수의 무자비한 퍼포먼스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